[Biz] 정주영 경영정신
지에프컨설턴트 조회수:1784
2015-02-04 14:13:00

정주영 경영정신

홍하상 지음

 

 

 

정주영 경영정신 1 : 나는 절대 머무르지 않는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에서,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주영의 아버지 정봉식은 약 4,000평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던 중농이었는데, 중농이라고는 해도 그 무렵 우리나라 농촌의 사정이 그러하듯이 하루에 세 끼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정주영의 조부는 서당의 선생님이었는데, 정주영은 다섯 살 되던 무렵부터 여덟 살까지 서당에 가서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소학』,『대학』,『맹자』, 『십팔사략』등을 배웠다. 서당을 마친 정주영은 열 살 되던 해에 송전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공부를 하고 졸업했는데, 당시의 졸업 성적은 전교 2등이었다고 하며, 이는 정주영의 최종학력이 된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농사를 지으러 나갔는데, 당시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 동아일보>를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농사일이 끝나면 매일 밤마다 2킬로미터를 달려 구장 집으로 가, 구장으로부터 <동아일보>를 빌려, 거기에 연재되고 있는 소설 -이광수의『흙』- 을 호롱불 아래에서 읽었다고 한다.

 

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1년 4개월 간 농사를 배우던 정주영은 드디어 가출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우선 청진 쪽으로 가기로 하고, 집을 나와 하루를 걷자 함경남도 원산 못 미쳐 고원이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고원은 탄광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일단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정주영은 우선 철도공사판의 노동자가 되어, 잠은 함바에서 잤고, 밥도 거기서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와,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다. 형제가 아무리 많아도 장손이 기둥인데, 기둥이 빠져나가면 집안은 쓰러지는 법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고향을 지키면서 네 아우들을 책임져야 한다. 네가 아닌 동생들 중에 누가 집을 나왔다면 내가 이렇게 찾아 나서지 않는다.”라며 돌아가자고 사정했고, 정주영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 왔다.

 

두 번째 가출은 그 이듬해 4월이었는데, 이번엔 동행 -소학교 동창인 조언구와 정창령- 이 있었다. 한밤중 세 사람은 가출을 해 밤새 걸어 아침에 추지령이라는 고개 아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자락의 목로주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추지령 너머의 회양 -친구 정창령의 친척집이 있기 때문- 에 가기로 했다. 정창령의 친척집에서는 친척 아이의 방문을 기쁘게 맞아주었고, 느긋하게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데, 느닷없이 정창령의 형이 친척집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동생의 가출을 알고 그리로 잡으러 온 것이었다. 결국 정창령은 형의 손에 끌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정주영과 친구 조언구는 정창령 형의 설득을 끝내 뿌리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은 금강산으로 내처 걸었다. 도중에 두 청년은 결국 사기를 당해 하는 수 없이 금강산 자락에 있는 정주영의 작은 할아버지 집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저께 다녀간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작은 할아버지에 의해 결국 정주영은 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 번째 가출은 소 판 돈 70원을 꺼내, 서울에 가서 부기학원을 다닐 생각으로 감행되었다. 언젠가 <동아일보> 광고란을 보니 부기학원에서 6개월 속성으로 공부를 하면 회계원이나 경리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와 가지고 있던 돈 70원을 몽땅 학원에 맡기고, 학원 안에서 숙식을 하며, 단식부기와 복식부기 공부를 시작했고, 학원공부가 끝나면 기숙사에 들어가 죽어라고 책을 읽었다. 『나폴레옹전』,『삼국지』,『링컨』 전기 등을 그 때 읽었다. 2개월 뒤, 어느 날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버지가 불쑥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정주영이 깜빡 잊고 챙겨 나오지 못했던 서울의 부기학원 입학안내서를 발견하고 거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농사일에 매달렸는데, 그 해엔 흉년이 들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굳은 결심을 하고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이 살 길은 오직 서울에 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 날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동창 오인보 -3백석지기 부농의 아들로, 일찍 장가를 들었으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늘 가출할 생각만 하고 있었음- 를 찾아가 자신과 함께 서울에 가지 않겠냐고 제의한다. 오인보는 즉석에서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여 정주영은 또 다시 서울 땅을 밟게 되었으나,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 인천 부둣가에 가면 할 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인천으로 가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등짐을 지어 날랐지만 밥 세 끼를 먹기 어려웠다. 그 뒤 품앗이 일꾼, 막노동 등을 거쳐 서울 인현동에 있는 복흥상회라는 쌀 도매상에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는데, 정주영은 비록 쌀가게 종업원이었지만 매일 일찍 일어나 가게를 청소하고, 배달이 없을 때면 쌀 창고를 정리정돈하고, 부기학원에서 배운 부기 지식을 이용하여 복식부기로 장부 정리도 하며,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정주영 경영정신 2 : 지금의 실패보다 나중의 이익을 예상하라

 

1938년, 정주영은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었다. 복흥상회의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전형적인 난봉꾼이라, 결국 복흥상회를 정주영에게 넘기기로 결심한다. 정주영은 복흥상회의 단골손님과 쌀을 모두 물려받는 대신, 빌려 간 쌀은 이자를 쳐서 원금과 함께 갚는다는 조건으로 쌀가게를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가게 자체는 인수 조건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정주영은 신당동에 새로 가게를 얻어,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미 거래선을 확보하고 있는데다, 이젠 직원이 아닌 자신의 사업이었으므로, 물불 안 가리고 일에 뛰어들었고, 가게는 아주 잘되었다.

 

서울의 미곡상으로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던 정주영에게 어느 날 비운이 닥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함에 따라, 쌀의 공급과 배급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정주영이 운영하던 경일상회도 쌀장사를 할 수 없게 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경일상회를 정리하고 나니, 수중에는 1,050원의 돈이 남았고,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 고향으로 가, 우선 아버지에게 논 2천여 평을 사드리고, 또 농사자금에 보태라고 현금도 얼마간 건네 드렸다. 그리고 그 때 아산리 구장의 딸이었던 변중석과 결혼해, 서울 현저동 산비탈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경일상회 때의 단골이었던 이을학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아현동 고개 근처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매물로 나왔는데, 그것을 사서 한번 운영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아도서비스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3,500만원이라는 큰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정주영은 오윤근 영감 -삼창정미소 주인으로 쌀가게 시절 정주영에게 쌀을 대주던 사람- 을 찾아가,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려고 하는데 돈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오윤근은 잠시의 생각할 시간도 두지 않고 곧바로 3,000원을 내놓았다. 정주영의 신용을 믿고 내준 것이다. 정주영은 마침내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정주영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자마자 ‘일본질소광업’이라는 회사에서 두 대의 트럭을 고쳐달라고 맡겨왔고, 며칠 후에는 트럭이 강물에 빠졌다며 손을 봐달라는 일거리가 들어왔다. 이어서 당시의 권력가였던 윤덕영이 미국제 올즈모빌 승용차 한 대를 고쳐달라고 정주영의 수리공장을 찾아오는 등 공장은 날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주영은 두 인부와 함께 밤이 늦도록 자동차 도색작업을 하고, 숙직실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난 정주영은 세수할 물을 데우려 불을 피우기 위해 화덕에 시너를 조금 부었다. 그 순간 화악 하고 불길이 일었다. 화덕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고, 불길은 수리를 하기 위해 세워둔 자동차에까지 번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결국 불길은 수리 중이던 자동차를 태우고 공장마저 완전히 태운 후에야 꺼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뾰족한 수가 없어 정주영은 다시 오윤근 영감을 찾아갔고, 오윤근은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였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다시 더 빌려주겠네.”라면서 또 한 번 3,500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놓았다.

 

정주영은 이 돈으로 신설동에, 두어 평 짜리 정비소와 대장간 하나를 만들어 다시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이 줄을 서서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규모가 큰 정비소에서 열흘이 걸려 수리할 자동차를 정주영은 단 사흘만에 고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문을 연 아도서비스 공장은 개업 후 3년 동안 장사가 아주 잘 되어, 오윤근 영감에게서 빌린 총 6,500원의 돈을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깨끗하게 갚을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어느 날, 정주영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일본 정부가 기업정비령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모든 기업을 군수물자 생산체제로 바꾸기 위한 것- 을 내린 것이다. 총독부로부터 아도서비스를 종로에 있는 일진공작소에 강제 흡수 합병한다는 통지서가 날아 왔다. 정주영은 하는 수 없이 아도서비스의 청산절차에 들어갔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상당한 자금이 남았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곧 보광광업주식회사라는 회사와 하청계약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홀동 광산의 광석을 평안남도 진남포에 있는 제련소까지 운반하는 일- 을 맺었다. 거리는 130킬로미터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중간에 높은 산들이 버티고 있는데다 비포장도로여서 광석을 운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진남포 제련소 소장은 정주영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다름 아닌 자신의 친구에게 그 사업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결국 제련소 소장의 친구에게 -자신의 트럭을 전부 인수한다는 조건으로- 회사를 처분하기로 하였다. 사업은 정리되었고, 그의 수중에는 5만여 원의 돈이 남았다. 정주영은 그 돈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얼마간 조용히 머리나 식히며 살 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해방이 되었다. 후에 깨달은 바지만, 정주영으로서는 광석 운반사업을 처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몇 개월을 더 뭉그적거렸으면 해방을 맞아 전 재산을 몽땅 날리게 되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인생사는 새옹지마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주영 경영정신 3 : 기업가가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주영도 무엇을 할 것인가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1946년 4월, 중구 초동 106번지(오늘날의 충무로 명보극장 자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창업 동지로는 매제인 김영주와 고향친구 오인보, 최기호가 참여했는데, 오늘날의 ‘현대’라는 상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이 때였다.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첫 번째 일은 미국 병기청에 가서 엔진을 바꾸어 다는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이윤도 많지 않아 1년 정도만 투자하고 말았다. 그보다 더 돈이 되는 일이 있었는데, 고물이 된 일제 자동차를 사서 개조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손님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고, 정주영은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었다. 그 뒤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더 달았고, 미 군정청 건물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처음엔 관청 내부수리와 같은 간단한 작업만을 따냈으나, 그 간단한 공사도 많이 하다보니 첫 해에만 1,530만 환의 계약액을 기록했다.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1950년 1월에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사옥을 옮기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중구 필동의 ‘현대건설주식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쟁의 위기를 성공의 기회로

5개월 뒤, 한반도에는 6.25전쟁이 터졌다.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갔고,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렸다. 당시 미국 사령부에서 통역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유학파였던 동생 정인영이 통역원으로 합격하게 되는데, 그는 통역 중에도 미국 공병대 통역을 자청했다. 혹시 형이 맡을 수 있는 공사라도 따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 때문이었다. 마침 그 때 한꺼번에 밀려든 미군 병사 10만 명의 숙소를 만드는 일이 있었는데, 그 건이 정주영에게 주어졌고, 정주영은 학교 운동장에 널빤지를 깔아 그 위에 천막을 쳐 임시숙소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숙소들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하루 세 시간도 잘 틈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 달만에 수천 동의 미군용 숙소를 만들어주었는데, 공사 대금을 수령하니 자그마치 2,000만 환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되었다. 6.25전쟁이 정주영에게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된 셈이었다.

 

보리밭 잔디 이야기

1953년, 전쟁이 끝난 추운 어느 겨울, 갑자기 UN군사령부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부산의 UN군 묘지에 잔디를 깔아 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도전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 바로 정주영이다. 정주영은 무조건 파란 풀밭으로 만들어주면 되겠느냐고 되물었고, UN군사령부 측에서는 그것이 잔디이든 잡초이든 간에 일단 조경공사가 급하다고 했다. 정주영은 낙동강 근처의 보리밭을 몽땅 사서, UN군 묘지에 마치 잔디밭처럼 보리를 옮겨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한겨울 황량하기만 했던 UN군 묘지가 불과 며칠만에 푸른 보리밭으로 변해 버렸다. 그로부터 닷새 후, UN군 사절단은 묘지를 방문했고, 남의 나라 전쟁에서 희생된 자국의 병사들을 위해 한국이 묘지를 잘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그들은 “땡큐”와 “원더풀”을 연발했다. 정주영에 대한 UN 사령부 측의 신뢰는 더욱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고령교 공사

1953년 4월, 정부는 고령교 복구공사를 현대건설에 의뢰했다. 이 공사는 당시 정부 발주공사로서 최대규모(금액 5,457만 환)였는데, 24개월 내에 공사를 끝내야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정주영은 즉각 교량의 복구에 들어갔다. 강의 백사장에 모래를 깊이 파고 기초공사를 하고 났더니만, 여름이 시작되어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 간신히 기초공사를 했던 교각의 하단부가 깊은 물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비가 그치자 강물의 수심도 내려갔고, 다시 교각 한 개를 세우고 있는데, 느닷없이 또 한 번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물이 바다처럼 불어나더니 교각은 힘도 못 쓰고 떠내려가 버렸다. 장비가 부실하다보니 공사의 대부분을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만 했고, 더구나 그 사이 물가는 1년 사이에 120배가 뛰었다. 결국 고령교 공사는 계약기간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다. 애초에 공사 금액이 5,457만 환이었으나, 공사에 들어간 돈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1억 2,000만 환이나 되었다. 사실 정주영도 공사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까지 공사를 감행했던 것은 오직 신용 때문이었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 실패에 대해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는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실패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달랬다고 한다.

 

국내 건설업계를 평정하다

1957년 9월, 정부는 한강 인도교 건설공사를 정주영에게 발주했다. 정주영은 고령교 공사를 질질 끌다가 빚만 뒤집어썼으므로, 이번에는 최단시간 내에 공사를 끝내려고 마음먹었고, 우선 한강 인도교 공사의 완공을 위해 연인원 42만 4,000여 명의 노무자와 2,000톤의 시멘트, 그리고 2,700톤의 강철제 및 30만 보드휘트의 목재를 썼다. 그리고는 공사를 시작한 지 단 1년 만에 공사를 끝내 버렸다. 대성공이었다. 공사 금액의 무려 40퍼센트가 이익으로 남았던 것이다. 한 번 상승세를 타니까 현대건설에 공사가 몰리기 시작했고, 1960년 드디어 현대건설은 국내도급 순위 1위에 오르게 되었다.

 

정주영 경영정신 4 : 학벌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일을 한다

 

정주영은 사람을 뽑을 때 경력이나 학벌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을 보았다. 그는 또 사원을 뽑을 때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여부를 먼저 보았다. 열정이 있어야 열심히 노력을 하고, 마침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참고로 정주영은 인재를 선발하고 나면 부하직원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스타일이었는데,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 부하직원에게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순간적인 판단은 매우 날카로우며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아울러 그는 골치 아프게 고민하거나 끙끙거리지 않고, ‘뭐든지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또 한없이 쉬운 게 일이다.’며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재빨리 밀고 나가는 편이었다. 또 하나, 격식도 중시하지 않았다. 관청에 들어가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과장, 심지어는 사무관에게까지 ‘-님’을 붙여주곤 했다.

 

정주영 경영정신 5 : 위기는 항상 기회를 숨기고 있다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정주영은 해외로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 입찰이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공사 입찰경쟁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게 된다. 이는 국내 건설업계 최초의 해외진출이었는데, 고속도로 공사를 해 본 경험이 전무한 한국의 건설업계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공사를 수주한 사람은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었다.

 

파타니-나랏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태국 남부의 말레이시아 국경 인근에 있는 두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 -2차선으로, 98킬로미터를 30개월 내에 끝내는 것- 였는데, 공사 낙찰가액은 미화 522만 달러였다. 하지만 공사는 어려웠다. 우선 날씨부터가 문제였는데, 한국에서는 장마철에 주로 비가 오지만, 태국 현지는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왔다. 비가 너무 많이 왔으므로, 모래와 자갈이 항상 젖어 있어, 그대로 시공할 경우 아스콘이 제대로 제조되질 않았다. 어느 날 공사현장을 방문했던 정주영은 자갈을 직접 철판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때 자갈을 말리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덕분에 공사 진척은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렵사리 공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 감리회사는 공사현장을 돌아본 후 재시공을 지시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제는 공사비도 공사비려니와 계약기간 내에 공사를 끝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정주영이 태국으로 날아가 미국인 감리를 직접 설득했으나, 감리는 원칙대로 할 뿐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공사를 하다가 장비가 모자라면 사들이고 하는 방식으로 결국 공사를 29개월만에 완공했다. 14억 7,900만 원에 수주를 했는데, 공사가 끝나고 나니 투입된 금액은 17억 6,700만 원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국제사회에서는 반드시 원칙대로 일해야 하고 최상의 질을 유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뒤 태국 정부는 현대건설이 막대한 적자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몇 가지 공사를 더 맡기게 되는데, 탁토엔 고속도로 공사, 얀희 매립공사, 랑수앙파타룽 고속도로, 수판부리차이낫 고속도로 등 여러 건의 공사를 계속 발주했다.

 

베트콩의 공격을 맞으며

1966년 1월, 정주영은 월남전에 뛰어들었는데, 우리나라가 파병 등 군사원조를 하는 한편으로 월남의 건설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은 준설산업을 주로 맡았는데, 현대가 처음 따낸 공사는 캄란만 군사기지 준설공사였다. 이어 또 다른 큰 공사 -메콩강 갈대숲 준설공사- 가 맡겨졌다. 원래 메콩강 유역은 미군이 준설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베트콩이 준설하고 있던 미국의 준설선 자마이카 호를 폭파해버렸고, 캄란 소도시 건설공사를 해치운 현대의 실력을 눈 여겨 보고 있던 미군 측은 현대에게 메콩강 준설공사를 하도록 했다. 천하의 정주영도 이때는 몸을 사렸다. ‘현대’인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자 미9사단 사령관은 급기야 권총을 빼들고 위협했고, 결국 현대는 그간 지지부진하게 일을 진행하던 호주 등 3개국 공사팀의 일을 그대로 떠맡게 되었다. 현대건설은 우선 준설선 안쪽에 철도 침목을 깔아 방어막을 치고, 미9사단은 1개 소대를 보내 경호했다. 그러자 베트콩들은 물밑으로 수영을 해와 준설선에 접근해왔는데, 미9사단 측에서는 5분 간격으로 배 주위에 수류탄을 까 넣으며, 계속해서 공사를 진행하여 결국 완료하게 된다. 월남전에서 상당한 이익을 낸 현대는 재정적인 이익과 더불어 또 한 번 해외진출공사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게 되었고, 이는 태국에서의 경험과 더불어 국내 경부 고속도로 착공에 커다란 길잡이가 되었다.

 

소양강댐 공사

이번에는 댐 공사였는데, 공사현장은 강원도 춘천의 소양강이었다. 건설부는 애초부터 소양강댐을 콘크리트댐으로 설계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고 있었는데, 이 공사는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가 투입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일본계 건설회사인 일본공영 -구보타 회장, 사장, 부사장 등은 모두가 댐 건설계의 세계적인 권위자들이었음- 이 설계에서 기술용역까지 맡도록 사전에 내정되었었다. 그런데 일본공영 측의 설계는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는데, 철근과 시멘트 등 기초자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실정으로는 그러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정주영과 권기태 상무는 소양강댐이 신축될 현지를 돌아보고, 소양강댐 근처에 있는 모래와 자갈을 활용하여 사력댐으로 공사를 할 것을 서둘러 당국에 건의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력댐 안은 주무부서에 올라가자마자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내 빈축을 샀다. 주무부서에서는 감히 일개 건설업자에 불과한 정주영이 사력댐 안을 만들어 당국에 도전한다고 비난했으며, 모든 일이 거의 다 결정된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그에게 갖은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장관은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게 되는데, 대통령은 정주영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 장관과 함께 정확한 상황을 보고 받았고, 결국 대통령은 건설부장관에게 다시 한 번 재검토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주무부서인 건설부는 일본공영이 만든 콘크리트댐 건설안과 현대건설이 만든 사력댐 건설안 두 가지를 가지고 다시 연구에 들어갔다.

 

그 뒤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정주영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공영의 구보타 회장 -팔순이 넘었으며, 일제 때 북한에 있는 수풍댐을 만든 당사자- 과 사장이 병문안을 와서,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며 “우리 회사의 사토 사장은 콘크리트댐의 전문가이지 사력댐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그 선입관으로 콘크리트댐 설계를 한 것입니다. 제가 현장의 모든 조건을 검토해보았는데 소양강 지역은 암반이 취약하여 콘크리트댐보다 오히려 사력댐으로 건설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댐 건설의 전문가인 일본공영의 구보타 회장이 정주영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이었다. 결국 소양강댐은 당초 예산의 30퍼센트인 630억이 줄어든 사력댐으로 설계를 바꾸어 완공되었다.

 

정주영 경영정신 6 : 기업가는 부유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자동차 수리업자가 자동차 왕으로 / 세계를 놀래킨 조랑말, 포니

당시 한국에는 신진공업과 주식회사 새나라자동차가 유일하게 국산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신진공업은 1966년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하였고, 물론 자동차 부품의 상당부분은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새나라자동차의 경우, 일본 닛산자동차에서 생산된 블루버드의 부품을 100퍼센트 들여다 써서 사실상 일제나 다름없었다. 그 때 미국의 포드가 한국 진출을 희망하고, 합작 파트너를 고르기 위한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현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포드 측은 국제담당 부사장을 한국에 보내 면담을 실시했다. 그런데 정주영과의 면담은 단 두 시간만에 끝나 버렸다. 왜냐하면 정주영이 자동차 엔진의 구조에서부터 변속장치, 제동장치, 1만여 개의 부품과 그 명칭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설명을 하자 더 이상 오래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포드는 내한한 바로 다음날 정주영과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했는데, 합작비율은 현대가 21퍼센트, 포드가 79퍼센트였다. 현대는 1968년, 1년 만에 첫 제품인 코티나 자동차를 생산하여 곧바로 시판에 들어갔고, 이어 트럭과 버스도 출시했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판매하면서 애초부터 부품의 조립이 아니라 부품의 국산화에 뜻이 있었는데, 부품의 국산화는 우리나라에도 이익이지만, 정주영 자신에게도 이익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주영은 1차 계약기간이 끝나자, 포드 측에 합자 비율을 기존의 21대79에서 50대50으로 변경하자고 제의했고, 다행이 이 제의는 받아들여졌으나, 엔진공장의 설립문제를 놓고 합작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다.

 

그래서 정주영은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기술 개발’을 해서, 자체 브랜드를 가진 독자적인 모델의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다. 1973년에 설계는 이탈리아의 이탈디자인 사에 100만 달러를 주고 의뢰했고, 스타일링은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가, 엔지니어링은 역시 같은 회사의 만토바니가 맡았으며, 엔진은 엔진제작의 귀재인 영국의 조지 턴블과 계약했다. 그렇게 개발하여 현대는 1974년 10월 30일에 열린 제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첫 제품 ‘포니’와 스포츠카 형 ‘포니 쿠페’를 출품했는데, 포니는 그곳에서 뜻밖에 큰 인기를 끌었다.

 

해외시장에서 호평을 받은 포니는 국내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출고 개시년인 1976년에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퍼센트를 장악했고, 그 해 6월에는 에콰도르에 6대를 첫 수출함으로써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어 나이지리아, 예멘, 에콰도르 등 10여 개국에 1,019대를 수출했으며, 1977년에는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시장을 집중 공략했고, 유럽시장에도 거점을 확보하고 미국시장에 상륙할 채비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1978년에 포니는 단일 차종으로 총생산 10만 대를 달성하였고, 1980년에는 20만 대를 돌파했으며, 이중 15만 대는 내수, 5만 대가 수출이었다. 1982년 들어 신제품 ‘포니2’가 출시됐는데, 곧바로 캐나다에 2만 5,000대를 수출하여 그때까지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캐나다 소형자동차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이어 현대는 자동차의 왕국인 미국 공략에 나섰고, 수출한 지 4개월만에 5만 대를 돌파한 포니는, 수출 첫해인 1986년 한 해에 17만 대가 판매됐다.

 

박정희와 정주영 / 눈물로 맞은 준공식

1967년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을 때, 정주영은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고, 한밤중의 토론과 회의 끝에,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에게 ‘늦어도 내년 초에는 착공한다.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서 보고하라.’라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지시를 하고, 정부 내의 관련 부서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 뒤 대통령은 직접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땅 투기나 반발 세력의 비난 등 공사와 관련된 모든 난점들을 해결해나갔으며,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인 서울-수원 구간을 맡았다. 한편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야당은 돈 있는 자들의 향락에 도움만 된다느니, 경상도의 발전에만 신경을 썼느니, 아직은 시기상조라느니 하는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장차 늘어나는 물동량을 감당할 국가의 대동맥으로서 산업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68년 12월 21일 먼저 서울-수원 간 개통식이 열렸다. 그리고 공사가 계속되었는데, 공사 가운데 가장 힘든 구간인 옥천 공구 또한 현대가 맡고 있었다. 이 구간에는 당제터널 공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속도로 공사가 끝나기 몇 개월 전부터 정주영은 아예 현장 사무소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거기서 먹고 잤다.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제터널 남쪽에서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공사이자 최악의 난공사였던 당제터널의 상행선이 개통된 것이다. 총 429킬로미터 공사에 총 429억 원이 들었는데, 1킬로미터 당 1억 원이 들어 정부가 예상한 330억 원보다는 약 100억 원이 더 들었지만, 일본의 동명고속도로에 비하면 8분의 1 수준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마친 것이다.

 

이제는 중동 공략이다 / 입찰 성공 스토리 / 사상 최대의 공사, 주베일 항만 건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원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공사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였다. 급히 출국한 조사단은 사우디아라비아 현지를 돌아보고 부정적인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은 일단 포기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상의 전환으로 대통령의 생각을 바꾸고 재가가 받았다. 정주영은 우선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말이 통해야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직원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내에 아랍어 강좌부터 열었다.

 

그 후 어느 날 중역들을 소집하여 중동진출에 대해 설명하자, 국제담당 부사장이자 그의 동생인 정인영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정주영은 할 수 없이 교통정리에 들어갔다. 동생이긴 했지만 중동사업에 반대 입장이었던 정인영을 군포에 중장비 생산회사를 새로 만들어 그곳으로 보내버렸다. 그 외에 중동진출 반대론자들도 모두 일소하여 진용을 새로 짜고, 정주영 스스로 중동 공사의 총책임자를 맡았고, 그 아래엔 권기태가 국제담당 부사장이

댓글[0]

열기 닫기

top